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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畵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 양식 연대표 그리고 "퐁텐블로파"

by 행복한오즈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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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르네상스

북유럽 르네상스는 알프스산맥 북쪽 지역 즉, 저지대(유럽 북해 연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인 플랑드르 지방)과 독일, 프랑스, 영국 지방의 예술가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상을 채택하고 각색한 시기다. 그림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 기술 개선, 인쇄기의 발명과 인쇄술의 확산 덕분에,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대륙 전체에 퍼져 북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표현에 대한 비슷한 생각을 갖도록 자극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색채의 발달, 해부학의 이해, 세속적인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하지만, 북부 르네상스 운동은 사실적인 제단화祭壇畵와 초상화, 정교한 붓놀림, 판화의 대중화로 유명하다.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뒤러의 작품과 같은 강렬한 상상력과 사실주의를 중심으로 구체화되었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풍경화(파티니르와 브뤼헐)와 초상화 (홀바인)의 분야에서 정확한 관찰과 자연주의라는 북유럽 특유의 경향을 이어갔다.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북유럽 르네상스도 마니에리즘 시기로 끝났다. 하지만 마니에리즘 시기는 이탈리아에서보다 한 세대 정도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가 1600년경에 물러갔다. 북유럽 르네상스는 비록 1700년경에 끝났지만 유럽과 그 이후의 예술 운동을 계승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 미술에서 판화의 중요성은 그 영향력이 분명한 반면, 현대 예술가들의 리얼리즘 경향은 반 아이크의 그림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따라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북유럽 르네상스 운동은 그만큼 영향력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1400년~1559년  

1400년〈Die Auferstehung Christi〉 한스 멀처 Hans Multscher, 독일 조각가

1400-10년〈베리공작의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랭브르 형제(Limbourg Brothers, Herman, Jean, Paul: 1370/80년경-1416년)

 

Calendar gallery

1420년〈Thief on the Cross〉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플랑드르/네덜란드

             〈마리아의 결혼 The Marriage of Mary〉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플랑드르/네덜란드

             〈성탄절 Nativity〉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플랑드르/네덜란드

1420-25년〈수태고지 Annunciation〉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플랑드르/네덜란드

1425년〈The Seilern Triptych〉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플랑드르/네덜란드

1425-28년〈The Mérode Altarpiece〉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플랑드르/네덜란드

1430-40년〈Crucifixion and Last Judgement diptych〉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플랑드르/ 벨기에)

1432년〈겐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플랑드르/ 벨기에)

1433년〈붉은 터번을 두른 남자의 초상〉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플랑드르/ 벨기에)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 얀 반 에이크, 벨기에

             〈포르티나리의 제단화 Portinari Triptych〉 휘고 판 데어 구스(Hugo van der Goes), 플랑드르/벨기에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 독일

1433-35년〈Holy Trinity〉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플랑드르/네덜란드

1434-36년〈Annunciation〉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플랑드르/ 벨기에)

1434년〈Arnolfini Portrait〉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플랑드르/ 벨기에)

1435년〈롤랭 수상의 성모(Madonna of Chancellor Rolin)〉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플랑드르/ 벨기에)

             〈마지막 심판 Last Judgement〉 스테판 로크너 Stefan Lochner, 독일

             〈십자가에서 내림 The Descent from the Cross 〉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플랑드르/벨기에

1438-40년〈교회의 마돈나 Madonna in the Church〉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1390-1441. 벨기에)

1440년〈성모마리아를 그리는 성 누가〉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플랑드르/벨기에

             〈Portrait of a Woman with a Winged Bonnet〉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플랑드르/벨기에

             〈The Virgin and Child before a Firescreen〉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 플랑드르/네덜란드

1440-42년〈Madonna of the Rose Bower〉 Stefan Lochner, 독일

1445년〈십자가 Crucifixion〉 스테판 로크너 Stefan Lochner, 독일

1445-50년〈Triptych with the Virgin in the Garden of Paradise〉 스테판 로크너 Stefan Lochner, 독일

             〈Beaune Altarpiece〉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플랑드르/벨기에

             〈일곱 성찬 제단, 삼부작 Seven Sacraments Altarpiece, a triptych〉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플랑드르/벨기에

1452년〈Braque Triptych〉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플랑드르/벨기에

1457-64년〈갈보리 십자가 Calvary or Crucifixion〉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플랑드르/벨기에

 

〈메로드의 제단화Mérode Altarpiece〉 로버트 캉팽Robert Campin, 1430년

치수 : 전체 (열린 경우), 25 3/8 × 46 3/8 인치; 중앙 패널, 25 1/4 × 24 7/8 인치; 각 날개, 25 3/8 × 10 3/4 인치

〈헨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432년

 

12개의 내부 패널. 이 개방형 뷰의 크기는 3.4m × 4.6m 입니다.

"퐁텐블로 파(School of Fontainebleau)[École de Fontainebleau(프)]"

Chateau_Fontainebleau.  사진=wikipedia.org


이탈리아적이 아닌 것을 '북유럽'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프랑스도 북유럽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좋은 예로는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에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장 클루에(Jean Clouet. 1480-1541)와 퐁텐블로 화파를 들 수 있다. 퐁텐블로 화파는 16세기 프랑스의 퐁텐블로 성(城)과 관련되어 하나의 양식으로 함께 작업한 일군의 작가들을 말하며 1차와 2차로 나뉜다.

프랑수아 1세(1494-1547)는 스스로 학문과 예술을 장려한 위대한 이탈리아의 왕들에 뒤지지 않도록 국가 차원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예술을 부흥,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퐁텐블로 궁을 전면 개축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는 그의 장엄한 계획을 실현할 미술적 전통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거장들을 불러왔으며, 이에 따라 1528~1558년 30여 년에 걸친 작업이 전개되었다. 퐁텐블로 궁에서 작업한 2명의 가장 탁월한 이탈리아 미술가는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와 프리마티치오(Francesco Primaticcio, 1505~1570)였다. 이들은 각각 1531년과 1532년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피오렌티노는〈프랑수아 1세의 갤러리〉에서, 프리마티치오는〈대접견실〉과〈에탕프 공작부인의 방〉에서 자신의 양식을 프랑스 궁정의 우아하면서 세련된 취향에 맞추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피오렌티노는 1540년 사망 시까지 줄곧 종사하였다. 이들과 프랑스와 플랑드르 미술가들의 결합은 특별한 매너리즘 양식을 탄생시켰고, 이는 감수성과 예민한 장식적 감각 그리고 여성적인 관능미와 창백함, 우아함으로 대별된다. 벽은 소석회 또는 석고를 돌가루나 흙과 섞어 고부조(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를 완성했고, 금박을 올리는 스투코(Stucco) 기법으로 높고 낮음의 편차가 큰 장식 부조를 액자처럼 만들었다. 특히 피오렌티노는 가죽이나 양피지 같은 모양으로 틀을 만드는 특이한 모티브를 창안해냈으며, 이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대중적인 장식적 형태가 되었다.

 

  1500년~1529년  

1500년〈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히에로니무스 보슈 Hieronymus Bosch,네덜란드

              〈모피 코트를 입고 있는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독일

1503년〈조롱당하는 그리스도 The Mocking of Christ〉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Mattias Grunewaltl, 독일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505년경

 

극도의 세밀함을 특징으로 하는 뒤러의 작품은 주제를 아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는 종교화에서나 초상화에서나 항상 주제의 핵심까지 꿰뚫어본다.

 

1507년〈아담과 이브 Adam and Eve〉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독일

1510-30년〈Eve, the Serpent and Death〉 한스 발둥 그린 Hans Baldung, 독일

1512년〈The Trinity and Mystic Pietà〉 한스 발둥 그린 Hans Baldung, 독일

1512-16년〈The Penitence of Saint Jerome〉 요아힘 파티니르 Joachim Patinier, 플랑드르/네덜란드

1515년〈이젠하임 제단화 Second state of the Isenheim Altarpiece〉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altl, 독일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 Landscape with Charon Crossing the Styx〉요아힘 파티니르 Joachim Patinir, 1515-24년

 

파르타니의 작품에서는 초기 북유럽 르네상스 특유의 고딕 양식 요소들이 눈에 띈다. 카론은 그리스 신화에서 지옥인 하데스로 승객을 실어준다. 그가 그린 하데스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도시처럼 건물들이 불타고 있으며, 히에로니무스 보슈 풍의 절망과 고통에 찬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작품은 북유럽 풍경화 전통을 일찍부터 예고하고 있다.

 

1515-19년〈Landscape with St Jerome〉 요요아힘 파티니르 Joachim Patinier, 플랑드르/네덜란드

1515-24년〈Landscape with Charon Crossing the Styx〉 요아힘 파티니르 Joachim Patinier, 플랑드르/네덜란드

1517년〈작센의공주〉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독일

1520년〈어머니를 떠나는 그리스도 Christ taking Leave of his Mother〉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Albrecht Altdorfer, 독일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 Christ Before Pilate〉 히에로니무스 보슈 Hieronymus Bosch,네덜란드

1523-25〈큰 십자가 Large Crucifixion〉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altl, 독일

1525년〈프랑시스 1세 François I of France〉 장 클루에 Jean Clouet, 프랑스

              〈원근법 연구(목판화)〉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독일

1527년〈다나에 Danae〉 얀 호사르트 & 얀 마뷰즈 Jan Gossaert/Jan Gossaert

1529년〈알렉산더 이수스 전투 The Battle of Alexander at Issus〉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Albrecht Altdorfer, 독일

 

  1530년~ 1539년 

1530년〈한 상인의 초상 Portrait of a Merchant,〉얀 호사르트 & 얀 마뷰즈 Jan Gossaert/Jan Gossaert

              〈The Nymph at the Fountain〉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독일

1530-35년〈프레데릭 3세의 초상 Portrait of Frederick III, Elector of Saxony〉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독일

1530-39년〈Salome with the Head of Saint John the Baptist〉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독일

1533년〈프랑스 대사들〉소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독일

1536년〈십자가에 묶인 그리스도와 개종한 로마의 대장〉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독일

              〈헨리 8세의 초상 Portrait of Henry VIII〉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독일

사진:  © 2020 National Gallery of Art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개종한 로마의 백부장 The Crucifixion with the Converted Centurion〉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1536년,

 

크라나흐는 오랜 경험을 통해 두 가지 스타일을 개발했다. 하나는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은밀하게 팔리던 나체화 등의 대중적인 그림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식적인 의뢰에 따른 궁정 회화들로서 주로 초상화나 종교화 들이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로마인 대장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크라나흐가 종교화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개인적으로 종교적 이미지의 가치를 의문시하는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를 지지했으며, 작품에도 그런 점이 반영되어 일종의 타협 같은 것이 나타난다.

 

1537년〈샘의 님프〉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독일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Portrait of Christina of Denmark〉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 1538년

 

우리는 홀바인의 작품에서 뒤러의 것과는 대조적인 초상화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홀바인은 모델의 내면세계를 자세히 고찰하지 않고 표면만을 보여 주는 데 그쳤다.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궁정 및 외교 초상 화가라는 그의 지위를 감안하면 이렇게 거리를 두는 접근법이 어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여왕은 아니었지만 밀라노의 공작부인이었고 네덜란드의 귀족이었다. 그녀는 홀바인에게 이 강렬한 그림을 그리는 데 단 세 시간 동안의 스케치만을 허용했다고 한다.

 

1538년〈어린 시절의 에드워드 6세 ​Portrait of Edward VI as a Child〉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 독일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의 초상〉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 독일

 

  1540년~1600년  

1540년〈헨리 8세〉 소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독일

              〈Hunting near Hartenfels castle〉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독일

1541-44년〈The Three Ages of Man and Death〉 한스 발둥 그린 Hans Baldung, 독일

1563년〈바벨탑〉 대 피터르 브뤼겔(Pieter Brueghel 1528-1569), 플랑드르/네덜란드

1565년〈추수하는 사람들〉 대 피터르 브뤼겔(Pieter Brueghel 1528-1569), 플랑드르/네덜란드

              〈눈 속의 사냥꾼들〉 대 피터르 브뤼겔(Pieter Brueghel 1528-1569), 플랑드르/네덜란드

1568년〈장님의 우화 The Blind Leading the Blind〉 대 피터르 브뤼겔(Pieter Brueghel 1528-1569), 플랑드르/네덜란드

 

프랑수아 1세 Francis I, 장 클루에 Jean Clouet (1480–1541), 1525-1530

Oil and tempera on wood panel, 37 3/4 × 29 1/8 in 95.9 × 74 cm, Musée du Louvre

 

프랑스 출신의 궁정화가 장 클루에 (Clouet, Jean 어쩌면 그의 아들 프랑수아 클루에 François Clouet 일지도 모른다)는 〈프랑시스 1세〉에서 전형적인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은 인간의 모든 약점을 배제시킨, 철저하게 군주다운 풍모이다. 초 인간적인 모습으로 위압하는 이 그림에서는 외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퐁텐블로 화파는 로소와 같은 이탈리아인 방문객들이 추구했던 우아미를 자신들의 화풍으로 삼았다. 그들에게서는 이탈리아 마니에리즘풍의 세련된 맛과는 다른 생생한 사실주의가 보인다. 또 프랑스적이라기보다는 북유럽적인 서툰 솜씨도 가끔 보인다.​

〈사냥꾼 다이애나 Diana the Huntress〉퐁텐블로 화파, 1550년경

 

프랑시스 1세는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에 있는 고딕식 성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개발했다. 왕은 이탈리아에서 온 화가들과 조각가들을 고용했고, 퐁텐블로는 남유럽의 영향이 북유럽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되었다. 퐁텐블로의 시인들은 다이애나를 비너스보다 더욱 중요한 신으로 취급했다. 다이애나가 그려진 방식을 보면, 마니에리즘 미술에서 자주 나타났던 유연한 선과 장식적인 자세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짙은 숲속에서 뜀박질하는 마스티프견을 데리고 있는 〈사냥꾼 다이애나〉는 나무의 님프를 잘 그려내고 있다. 크라나흐가 그린 나체의 사냥꾼과는 달리 다이애나는 전혀 수줍어하지 않으며, 사랑스러운 동물처럼 활기 있게 걷고 있다.

〈눈 속의 사냥꾼들 The Hunters in the Snow〉페테르 브뤼헐 Pieter Bruegel (also Brueghel or Breughel) the Elder, 1565년

 

브뤼헐은 풍경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565년 그는 1년 중 각각의 달에 어울리는 풍경화들을 그렸다. 이것은 〈성무일과서에서 볼 수 있는 달력 삽화의 전통이다. 이 성무일과서에는 원래 농민들의 생활이 궁정 생활과 번갈아가며 묘사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오직 농민 장면들만이 전해지고 있다.

〈결혼 잔치The Peasant Wedding〉페테르 브뤼헐 Pieter Bruegel (also Brueghel or Breughel) the Elder, 1567-68년

 

브뤼헐은 당시 농민들의 생활을 주제로 삼아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그중 하나이다. 고상한 지식인이었던 그가 그림과 같은 생생하고 활기에 찬 장면을 이렇게 깊이 담아냈다는 것은 특이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브뤼헐의 농민 그림들은 거친 유머가 깔려 있지만, 농민들이 살고 있는 험한 상황에 대해 거의 죄책감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동정심을 내비치고 있다.

마니에리즘(영어: Mannerism, 이탈리아어: Manierismo 마니에리스모)이 확산되는 북유럽

당시 이탈리아에서 온 프리 마티 치요(1505~1570)의 독특한 인물, 즉 얼굴이 작고 팔다리가 길쭉하고 우아하며 약간 비현실적인 미술 형식은 사실상 1616세기 말까지 프랑스 미술에서 하나의 전형(典刑)이 되었다. 이런 형식의 미술은 북유럽의 귀족들에게 널리 인기를 끌었으며, 파리의 영향권 바깥에도 몇 명의 뛰어난 화가들이 있었다. 북부 네덜란드(요즘은 이 지역을 그냥 네덜란드라고 부른다) 출신의 요아힘 테와 엘(Joachim Wtewael, 1566-1638)은 그런 화가들의 한 예이다. 위트레흐트에서 태어난 그는 활동 초기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한 다음 다시 위트레흐트로 돌아와서 정착했다. 그는 동시대인인 뒤러나 크라나흐가 발전시킨 자연주의적 성향을 다소 무시했지만, 네덜란드의 마니에리즘에서는 중요한 화가가 되었다.

마니에리즘 양식의 또 다른 출중한 화가는 플랑드르의 화가 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랑거(Bartholomeus Spranger, 1546-1611)이다. 그는 앤트워프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빈에서 일하다가 프라하에 정착했다. 1581년에 그는 황제 루돌프 2세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할렘 아카데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Vulcan and Maia 〈벌칸과 마야〉, Bartholomeus Spranger 바르톨로메우스 수프랑거(1546~1611), 1585년경

Oil on copper, 23 × 18cm,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슈프랑거의 〈벌칸과 마야〉는 머리가 아찔할 정도의 선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마야는 근육질의 음험한 벌칸의 무릎 위에서 활처럼 몸을 한껏 휘고 있다. 마치 그가 화살을 장전하기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이다. 벌칸이 긴 손가락 하나를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자. 그녀는 그 아래서 도발적으로 몸부림친다. 어찌 보면 약간 불쾌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힘과 기묘한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퐁텐블로의 미술에는 가벼움과 귀족적인 순진함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특징들은 마니에리즘이 태양 가득한 파리에서 진짜 북유럽의 어두운 튜튼족의 숲으로 이동함에 따라 사라지게 된다. 슈프랑거와 그의 추종자들의 미술은 사악한 향취와 타락의 냄새를 풍긴다.

〈파리스의 판결 The Judgment of Paris 〉, Joachim Wtewael 요아힘 테와엘

1615, Oil on oak, 59.8 x 79.2 cm

 

테와엘은 북부 네덜란드의 선도적인 마니에리즘 화가들 중의 하나이다. 그의 작품은 우아한 인물 회화에 집착하고 있는데,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왜곡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유난히 화려한 색상들이 쓰이고 있다. 이 장면의 배경인 우아한 생물들로 가득한 환상의 숲은 인공적인 느낌이 강한 전형적인 마니에리즘의 배경이다. 목동 왕자 파리스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여신에게 황금사과를 헌사하는 장면을 그린 〈파리스의 판결〉은 고도로 마니에리즘적인 조합을 보여준다. 세 명의 성스러운 숙녀들은 의식적으로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파리스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자신의 중대한 선택을 알린다. 심지어 주변의 동물들조차도 아름다운 뿔과 가는 다리를 자랑한다. 이 모든 것들은 마니에리즘이 융성하는 신화적 낭만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퐁텐블로에서 작업하던 다른 이탈리아 미술가들로는 아바테(Niccolò dell' Abbate,1509~1571)와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1500~1570)가 있었으나 한편 뛰어난 벽화 〈사냥꾼 다이애나〉(1550)에서 보듯이 알려지지 않은 미술가들에 의한 작품도 많이 있다. 신화적인 주제, 길게 늘어진 우아함, 목가적인 풍경 배경, 복잡한 기교의 인공적인 분위기 등이 퐁텐블로파 작품의 전형적 특성들이다.

 

제2차 퐁텐블로 파는 종교전쟁(1562~1598)으로 단절된 이후, 앙리 4세(1589 ~1610)의 후원으로 작업한 작가들이다. 뒤부아(Ambroise Dubois), 뒤브레이으(Toussaint Dubreuil,1561~1602), 프레미네(Martin Fréminet)를 중심으로 많은 플랑드르 미술가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은 17세기로 향하는 중개자로서 힘찬 양식으로 1620년경까지 이어갔으나 제1차 작가 군들이 보여주었던 창조적인 탁월함은 지니지 못하였다.

▶마니에리즘, 이탈리아 語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라고도 불리는 매너리즘은 원래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던 16세기 후반의 미술사조를 뜻하는 말이다. 시기적으로 라파엘로가 죽은 이후 1525년부터 바로크 미술이 시작되는 1600년까지의 75년간인데, 예전에는 후기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사조이다. 먼저 매너리즘의 어원은 ‘손’이란 뜻을 가진 이탈리아 어인 ‘Mano’에서 왔다고 하며 그 어원이 뜻하는 바는 일정한 규범의 양식이라는 뜻이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의 이상미, 조화, 이성, 현실성 대신 부조화와 감성, 상상력 등으로 형태의 기이한 왜곡과 변형이 일어난다. 매너리즘의 가장 큰 특징은 '인체비례에 벗어나는 길쭉한 신체의 사람’, ‘기존의 구도에 벗어난 불안정한 구도’로 압축할 수 있다. 파르미자노(Parmigianino 1503~1540)의 〈긴목의 마돈나〉는 이런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참고: 웬디 베켓 수녀의 명화이야기 / 사진: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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